프랑수아 트뤼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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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수아 트뤼포는 프랑스의 영화 감독, 각본가, 배우이다. 1959년 영화 《400번의 구타》로 데뷔하여 누벨바그를 이끌었으며, 《피아니스트를 쏴라》, 《쥴 앤 짐》, 《밤의 연인》, 《마지막 지하철》 등 다양한 작품을 연출했다. 1983년 뇌종양으로 사망했으며, 1973년 《밤의 연인》으로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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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 트뤼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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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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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프랑수아 롤랑 트뤼포 |
출생일 | 1932년 2월 6일 |
출생지 | 프랑스 파리 |
사망일 | 1984년 10월 21일 |
사망지 | 프랑스 오드센주 뇌이쉬르센 |
국적 | 프랑스 |
직업 | 영화 감독 각본가 영화 제작자 배우 영화 평론가 |
활동 기간 | 1955년 ~ 1984년 |
배우자 | 마들렌 모르겐슈테른 (1957년 - 1965년, 이혼) |
친척 | 이냐스 모르겐슈테른 (장인) |
파트너 | 클로드 자드 (1968년; 약혼) 화니 아르당 (1981년–1984년; 사망) |
자녀 | 3명 |
로마자 표기 | François Roland Truffaut |
영화 운동 | |
영화 운동 | 프랑스 누벨바그 |
주요 작품 (감독/각본) | |
주요 작품 | 400번의 구타 (1959년) 쥴 앤 짐 (1962년) 밤의 연인들 (1968년) 야생 소년 (1970년) 두 명의 영국 여자와 대륙 (1971년) 아메리카의 밤 (1973년) 마지막 지하철 (1980년) |
주요 작품 (출연) | |
주요 작품 | 미지와의 조우 (1977년) |
수상 | |
아카데미상 |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 |
칸 영화제 | 칸 영화제 감독상 칸 영화제 국제카톨릭영화 사무국상 |
전미 비평가 협회상 | 전미 비평가 협회상 감독상 1973년 아메리카의 밤 |
뉴욕 영화 비평가 협회상 | 뉴욕 영화 비평가 협회상 감독상 뉴욕 영화 비평가 협회상 각본상 뉴욕 영화 비평가 협회상 외국어 영화상 |
영국 아카데미 영화상 | 영국 아카데미 영화상 감독상 |
세자르상 | 감독상 각본상 |
기타 수상 | 보스턴 영화 비평가 협회상 보스턴 영화 비평가 협회상 외국어 영화상 |
2. 생애
파리에서 태어난 트뤼포는 부모의 이혼으로 고독한 유년 시절을 보냈고, 여러 차례 부모에 의해 감화원에 보내지는 등, 부모와의 관계에서 문제가 많은 소년이었다. 1946년에는 일찍이 학업을 포기하고 영화관에 틀어박혀 지냈으며, 1947년에는 시네클럽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실연을 계기로 군대에 지원했지만, 인도차이나 전선에 파병될 것을 두려워하여 탈영했고, 도중에 붙잡혀 군사 감옥에 투옥되기도 했다.
20세가 되자, 앙드레 바쟁의 권유로 영화 평론을 쓰기 시작하여 『카이에 뒤 시네마』를 중심으로 예리하고 공격적인 영화 평론을 다수 집필했다. 특히, 1954년 1월호에 게재된 "프랑스 영화의 어떤 경향"이라는 글은 매우 날카로운 어조였다.
첫 번째 단편 영화를 발표한 후, 1956년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조감독이 되었다. 1957년, 배급 회사 사장의 딸과 첫 결혼을 하고, 같은 해, 제작사 레 필름 뒤 캐로스社를 설립, 두 번째 단편 영화 『동경』을 연출하여 다음 해인 1958년에 공개했다.
1959년, 캐로스社와 SEDIF(장인의 회사 코시노르의 자회사)의 공동 제작으로 처녀 장편 『네 살짜리 이야기』를 감독하여 제12회 칸 국제영화제에 출품되자 극찬을 받고, 감독상을 수상했다. 작품은 대히트를 기록하며 트뤼포와 누벨 바그의 이름을 일약 높이게 되었다. 이때 만난 영화사 마르소-코시노르 당시 매니저 마르셀 베르베르는 캐로스社의 실세가 되고, 또한 트뤼포 작품에 카메오 출연을 계속하게 된다.
1963년 4월 1일부터 10일까지 제3회 프랑스 영화제가 도쿄도 지요다구의 동상홀에서 개최되었다. 『갑자기 불처럼』 외에, 장-가브리엘 알비코코의 『황금빛 눈의 여자』, 『미국의 쥐』, 『미스 아메리카 파리를 달리다』, 『시베르의 일요일』, 『여자는 무섭습니다』, 『불멸의 여자』, 『지하실의 멜로디』, 『지옥의 결사대』의 총 9편의 장편과, 단편 영화 『올빼미의 강』이 상영되었다.[46] 트뤼포, 알렉산드라 스튜어트, 알랭 들롱, 마리 라포레, 세르주 부르기뇽, 알베르 라모리스, 프랑수와즈 브리옹 등은 영화제에 참가하기 위해 3월 28일에 일본에 왔다.[47][48] 잡지 기획에 따라, 트뤼포와 부르기뇽은 이치카와 곤, 마스무라 호조, 카와키타 카시코와 호텔 뉴 재팬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49]
1968년 칸 국제영화제에서 경연의 필요성 유무를 둘러싸고 대논쟁이 일어났고, 트뤼포는 칸 국제영화제 파괴를 주장하며 가장 과격한 논쟁을 벌였다. 그러나 영화제의 개혁을 주장한 트뤼포에 대해 장-뤼크 고다르는 정치적인 개혁을 호소했고, 두 사람의 방향성 차이가 명확해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절친했던 고다르와의 결별을 시작으로 누벨 바그의 멤버들과 소원해졌다.
1983년 7월에 뇌종양 진단을 받고, 미첼 베르제와 프랑스 갈 부부의 저택에서 요양했으나, 밀로시 포르만 감독의 『아마데우스』 프리미어에 참석하지 못한 채 1984년 10월 21일에 사망했다. 그가 생애에 제작한 영화는 25편이었다.
트뤼포의 죽음에 대해, 프랑스뿐 아니라 세계 각국의 영화 관계자들이 모여 성대한 장례식이 거행되었지만, 고다르는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고, 추도문도 짓지 않았다. 그러나 사후 4년이 지난 1988년에 출판된 트뤼포 서한집에, 그에게서 온 편지를 제공했다. 내용은 고다르를 맹렬하게 비난하는 어조였지만, 새롭게 쓴 서문에서는 "프랑수아는 죽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라고 끝맺었다.[51]
- 프랑스 영화의 아버지로 존경했던 장 르누아르가 미국에서 좌절에 빠져 있다는 소식을 듣고 여러 차례 미국을 방문하여 그를 격려했으며, 르누아르가 죽을 때까지 두 사람은 부자와 같은 관계를 유지했다. 또한, 자신의 분신과 같은 역할을 계속했던 장-피에르 레오에게도 아들과 같은 대우를 했다고 한다.
- 1980년 2월, 『녹색의 방』 홍보 캠페인으로 일본을 방문했을 때, 일본 영화 저널리스트가 당시 명화극장에서 상영 중이던 후카사쿠 긴지 감독의 『의리의 무덤』을 추천하여 트뤼포에게 보여주었다.[52] 그러나 트뤼포는 상영 10분 만에 극장을 나가 버렸고,[52] "왜 그랬느냐?"라는 질문에 "매우 피곤했고, 폭력적인 장면이 많아서 견딜 수 없었다. 폭력적인 영화보다 에로틱한 영화가 훨씬 좋다"라고 말했다.[52] "지금까지 본 영화 중에서 좋아하는 영화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는 "오손 웰스 감독의 『시민 케인』, 그리고 페데리코 페리니 감독의 『카사노바』가 좋다. 다른 것도 많아서 다 말할 수 없다. 그 영화들에 대해서는 여러 책에 써두었으니 읽어달라"라고 대답했다.[52]
2. 1. 어린 시절과 영화와의 만남
파리에서 태어난 트뤼포는 부모의 이혼으로 고독한 유년 시절을 보냈고, 여러 차례 부모에 의해 감화원에 보내지는 등, 부모와의 관계에서 문제가 많은 소년이었다.[7] 그는 서출로 태어나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어머니와 양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그는 치과 의사였던 친아버지를 단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고, 혼란스런 어린 시절을 보냈다.[9]1946년에는 일찍이 학업을 포기하고 영화관에 틀어박혀 지냈고, 1947년에는 시네클럽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15세 때, 후에 영화 평론지 카이에 뒤 시네마 초대 편집장(1951년 - 1958년)이 되는 평론가 앙드레 바쟁을 만나 그의 보살핌을 받게 되었고, 바쟁이 사망할 때까지 부자처럼 지냈다.[12]
트뤼포에게 영화는 불만족스러운 가정 생활에서 가장 큰 탈출구를 제공했다. 그가 여덟 살 때 처음으로 본 영화는 아벨 갱스의 《파라디 퍼듀》(《낙원 상실》, 1939)였으며, 이것이 그의 영화에 대한 집착의 시작이었다.[4] 그는 입장료가 없어 학교를 자주 빼먹고 몰래 극장에 들어갔다. 열한 살 때 그는 에밀 졸라의 테레즈 라캥을 읽었는데, 이 책은 그가 소설가가 되도록 영감을 주었다.[4] 여러 학교에서 퇴학당한 후, 열네 살에 독학을 결심했다. 그의 학업 목표 중 두 가지는 하루에 영화 세 편을 보고 일주일에 책 세 권을 읽는 것이었다.[8][10]
"내가 영화로 눈을 돌린 계기는 해방 이후 파리에 쏟아져 들어온 미국 영화들이었습니다."[4] 트뤼포는 앙리 랭글루아의 프랑스 영화자료관을 자주 찾았는데, 거기서 수많은 외국 영화를 접하며 미국 영화와 존 포드, 하워드 옥스, 니콜라스 레이와 같은 감독들뿐만 아니라 알프레드 히치콕과 같은 영국 감독들에게도 친숙해졌다.[11]
2. 2. 앙드레 바쟁과의 만남과 비평 활동
앙드레 바쟁은 1948년 트뤼포가 자신의 영화 동호회를 설립한 뒤 만난 인물로, 트뤼포의 직업적, 개인적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 바쟁은 평론가이자 다른 영화 동호회의 회장이었다. 그는 트뤼포의 절친한 친구가 되었고, 트뤼포가 성장하면서 겪은 여러 재정적, 범죄 관련 문제에서 그를 도왔다.[12]트뤼포는 18세가 되던 1950년 프랑스군에 입대했지만, 그 후 2년 동안 탈영을 시도하다 탈영 미수로 체포되어 군 감옥에 수감되었다. 바쟁은 자신의 정치적 인맥을 이용하여 트뤼포를 석방시키고 자신의 새로운 영화 잡지인 ''카이에 뒤 시네마''에서 일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몇 년 후, 트뤼포는 『카이에 뒤 시네마』의 평론가(그리고 후에 편집자)가 되었는데, 가혹하고 용서 없는 비평으로 악명을 얻었다. 그는 "프랑스 영화의 무덤 파는 자"라고 불렸으며,[13] 1958년 칸 영화제에 초대받지 못한 유일한 프랑스 평론가였다. 그는 바쟁이 영화 이론 중 가장 영향력 있는 이론 중 하나인 오토르 이론을 개발하는 것을 지지했다.[14]
1954년, 트뤼포는 『카이에 뒤 시네마』에 "프랑스 영화의 특정 경향"(Une Certaine Tendance du Cinéma Français)[10]이라는 기사를 썼다. 이 기사에서 그는 프랑스 영화의 현황을 공격하며, 장 르누아르, 로베르 브레송, 장 콕토, 자크 베커, 아벨 강스, 막스 오퓔스, 자크 타티, 로제 르낭아르 등 8명의 감독을 비판했다. 이 기사는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트뤼포는 전국적으로 발행되는 더 널리 읽히는 문화 주간지 『아르-레트르-스펙타클르』(Arts-Lettres-Spectacles)에 기고할 제안을 받았다. 트뤼포는 다음 4년 동안 그 출판물에 500편이 넘는 영화 기사를 썼다.
트뤼포는 나중에 오토르 이론을 고안했는데, 이 이론에 따르면 감독은 자신의 작품의 "저자"이며 르누아르나 히치콕과 같은 위대한 감독들은 그들의 영화에 스며드는 독특한 스타일과 주제를 가지고 있다. 그의 이론은 당시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1960년대 미국 평론가 앤드류 사리스의 지지를 얻었다. 1966년, 트뤼포는 히치콕과의 장편 인터뷰인 『히치콕/트뤼포』(Hitchcock/Truffaut)를 출판했다.
15세 때, 트뤼포는 후에 영화 평론지 『카이에 뒤 시네마』 초대 편집장(1951년 - 1958년)이 되는 평론가 앙드레 바쟁을 만나 그의 보살핌을 받게 되었고, 바쟁이 사망할 때까지 부자처럼 지냈다. 실연을 계기로 군대에 지원하지만, 인도차이나 전선에 파병될 것을 두려워하여 탈영했고, 도중에 붙잡혀 군사 감옥에 투옥되었으나, 그때도 바쟁이 보호자가 되어 군대로부터 구출해냈다.
20세가 되자, 바쟁의 권유로 영화 평론을 쓰기 시작하여 『카이에 뒤 시네마』를 중심으로 예리하고 공격적인 영화 평론을 다수 집필했다. 특히, 1954년 1월호에 게재된 "프랑스 영화의 어떤 경향"이라는 글은 매우 날카로운 어조였다.
2. 3. 감독 데뷔와 누벨바그
카예 뒤 시네마의 평론가로 활동하던 트뤼포는 1959년 《400번의 구타》를 감독하면서 영화계에 데뷔하였다. 이 영화는 1959년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하며 큰 성공을 거두었다. 트뤼포는 장뤼크 고다르, 에릭 로메르 등과 함께 누벨 바그를 주도하며 기존 영화 기법과는 차별화된 새로운 영화들을 선보였다.[6]《400번의 구타》는 위험한 악동 생활, 불행한 가정 환경, 그리고 소년원 생활까지 겪는 앙투안 두아넬의 이야기를 다룬 자전적인 영화이다. 트뤼포는 장-피에르 레오를 두아넬 역으로 캐스팅했으며, 레오와의 협업은 "앙투안 두아넬 시리즈"로 이어졌다.[6]
이 영화는 두아넬의 힘든 사춘기를 따라가며, 불안정한 부모 관계와 고립된 청소년기 사이에서 방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트뤼포는 사생아로 태어나 "아버지 불명의 아이"로 등록되는 등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냈고, 이러한 경험은 영화에 반영되었다.
《400번의 구타》는 프랑스 누벨바그 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으로, 르누아르, 비고의 프랑스 전통에 새로운 영화들을 연결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6] 타임은 이 영화를 가장 위대한 영화 100편 목록에 포함시키며, "현실적이면서도 부드럽게 실험적인 방식으로 완전한 비행 청소년과 장난을 치는 장난꾸러기 소년의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평가했다.[20]
트뤼포는 장-뤽 고다르의 영화 《쉬즈 굿》(1960)의 전제를 제공하기도 했다.[6]
2. 4. 다양한 작품 활동
오손 웰스의 「악의 손길」을 엑스포 58에서 본 후, 트뤼포는 비평과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400번의 구타」(1959)로 감독 데뷔를 했고, 1959년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했다.[6] 이 영화는 프랑스 누벨바그 운동의 시작을 알렸으며, 장-뤽 고다르, 클로드 샤브롤, 자크 리베트와 같은 감독들이 이 운동을 이끌었다.[6] 타임은 창간 이후 가장 위대한 영화 100편 목록에 이 영화를 포함시켰다.[20] 트뤼포는 고다르의 누벨바그 영화 「쉬즈 굿」(1960)의 전제를 제공했다.[6]영화 ''400번의 일격''의 성공에 이어 트뤼포는 차기작 ''피아니스트를 쏴라''(1960)에서 찰스 아즈나부르(Charles Aznavour)를 주연으로, 불연속적인 편집과 무작위적인 내레이션을 사용했다.[6] ''피아니스트를 쏴라''는 비평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았지만, 흥행에는 실패했다.[6]

트뤼포는 오스카 베르너(Oskar Werner), 앙리 세르(Henri Serre), 잔느 모로(Jeanne Moreau)가 주연한 삼각관계를 다룬 영화 《줄 앤 짐》(Jules et Jim, 1962)을 감독했다.[6]
1963년, 트뤼포는 《에스콰이어》(Esquire)지의 데이비드 뉴먼(David Newman), 로버트 벤턴(Robert Benton)이 쓴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보니와 클라이드》의 감독 제안을 받았으나, 결국 거절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고다르와 워런 비티(Warren Beatty)의 관심을 끌었고, 이들은 아서 펜(Arthur Penn) 감독과 함께 영화 제작을 진행했다.
트뤼포의 네 번째 영화 《부드러운 살갗》(La peau douce, 1964)은 개봉 당시 극찬을 받지는 못했다. 1966년 레이 브래드버리(Ray Bradbury)의 고전 공상과학 소설 『화씨 451(Fahrenheit 451)』을 각색한 화씨 451 (1966년 영화)는 트뤼포의 첫 번째 비프랑스어 영화였다. 영국에서 촬영된 그의 유일한 영어 영화는 트뤼포 자신이 영어를 거의 하지 못했기 때문에 큰 어려움이었다. 이 영화는 흥행에 실패했고, 트뤼포는 다시는 프랑스 밖에서 작업하지 않았다.[16]
《훔친 키스 (Stolen Kisses)》(1968)는 앙투안 두아넬 시리즈의 속편으로, 클로드 자드(Claude Jade)가 크리스틴 다르봉 역으로 출연했다. 촬영 중 트뤼포는 자드와 사랑에 빠져 잠시 약혼하기도 했다. 이 영화는 국제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고, 자드는 히치콕의 《토파즈 (Topaz)》로 할리우드에 데뷔했다.[18]

트뤼포는 《검은 베일을 쓴 신부 (The Bride Wore Black)》(1968, 잔혹한 복수극, 히치콕 영화에 대한 세련된 오마주), 카트린느 드뇌브(Catherine Deneuve)와 장 폴 벨몽도(Jean-Paul Belmondo)가 출연한 《미시시피의 인어 (Mississippi Mermaid)》(1969, 정체성이 뒤바뀐 로맨틱 스릴러) 등 다양한 소재의 작품들을 제작했다. 두 영화 모두 코넬 울리치(Cornell Woolrich)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야생아 (The Wild Child)》(1970)에는 트뤼포가 18세기 의사 장 마르크 가스파르 이타르(Jean Marc Gaspard Itard) 역으로 주연 배우로 데뷔하여, 야생아인 아베롱의 빅토르(Victor of Aveyron)를 치료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침대와 식탁》(1970)은 또 다른 앙투안 두아넬 영화이다.
《두 명의 영국 소녀》(1971)는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와 브론테 자매(Brontë sisters)"[6]에 관한 이야기로, "줄 엣 짐"의 러브스토리에 대한 여성적인 반영이다. 《나 같은 멋진 아이》(1972)는 코미디물(screwball comedy)이었다. ''낮과 밤''은 트뤼포에게 외국어영화상 아카데미상을 안겨주었다.[19]
1975년, 트뤼포는 ''아델 H의 이야기''로 명성을 얻었고, 주연 이자벨 아자니는 여우주연상 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랐다. ''작은 변화''(1976)는 골든 글로브 외국어영화상 후보에 올랐다. 로맨틱 드라마인 ''사랑하는 남자''(1977)는 소소한 성공을 거두었다.
트뤼포는 스티븐 스필버그(Steven Spielberg)의 ''미지와의 조우''(1977)에 과학자 클로드 라콤 역으로 출연했다.[21] 그는 헨리 제임스(Henry James)의 "죽은 자의 제단"을 원작으로 한 자신의 영화 ''녹색 방''(1978)에서 주연을 맡았다. 흥행에는 실패했기에 그는 두아넬 시리즈의 마지막 영화 ''도망치는 사랑''(1979)을 제작했다.
트뤼포의 마지막 영화 중 하나는 ''마지막 지하철''(1980)로, 세자르상(César Award) 12개 부문에 후보로 올라 감독상을 포함한 10개 부문에서 수상했다. 트뤼포의 마지막 영화 ''비밀스럽게 너에게''(1981)는 흑백으로 촬영되어 그의 첫 영화와 대비를 이루며, 히치콕에 대한 오마주이다.
2. 5. 배우 활동 및 저술 활동
트뤼포는 『카이예 뒤 시네마(Cahiers du Cinéma)』의 평론가(이후 편집자)로 활동하며 가혹하고 용서 없는 비평으로 악명을 얻었다. "프랑스 영화의 무덤 파는 자"라고 불렸으며,[13] 1958년 칸 영화제에 초대받지 못한 유일한 프랑스 평론가였다. 그는 앙드레 바쟁이 영화 이론 중 가장 영향력 있는 이론 중 하나인 오토르 이론을 개발하는 것을 지지했다.[14]1954년, 트뤼포는 『카이예 뒤 시네마』에 "프랑스 영화의 특정 경향"(Une Certaine Tendance du Cinéma Français)[10]이라는 기사를 기고하여 프랑스 영화의 현황을 비판하고, 8명의 감독을 열거하며 비판했다. 이 기사는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트뤼포는 전국적으로 발행되는 더 널리 읽히는 문화 주간지 『아르-레트르-스펙타클르』(Arts-Lettres-Spectacles)에 기고할 제안을 받았다. 이후 4년 동안 500편이 넘는 영화 기사를 썼다.
이후 오토르 이론을 고안했는데, 이 이론에 따르면 감독은 자신의 작품의 "저자"이며, 위대한 감독들은 그들의 영화에 스며드는 독특한 스타일과 주제를 가지고 있다. 1966년, 트뤼포는 알프레드 히치콕과의 장편 인터뷰인 『히치콕/트뤼포』(Hitchcock/Truffaut)를 출판했다.
《훔친 키스 (Stolen Kisses)》(1968) 촬영 중 트뤼포는 클로드 자드(Claude Jade)와 사랑에 빠져 잠시 약혼하기도 했다.[18]
《야생아 (The Wild Child)》(1970)에는 트뤼포가 18세기 의사 장 마르크 가스파르 이타르(Jean Marc Gaspard Itard) 역으로 주연 배우로 데뷔하여, 야생아인 아베롱의 빅토르(Victor of Aveyron)를 치료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트뤼포의 출연작은 다음과 같다.
연도 | 제목 | 역할 | 비고 |
---|---|---|---|
1956 | 바보의 짝짓기 (Fool's Mate) | 파티 손님 | 크레딧 미등재 |
크로이처 소나타 (La sonate à Kreutzer) | |||
1959 | 400번의 구타 (The 400 Blows) | 유원지의 한 남자 | 크레딧 미등재 |
1963 | 모든 것을 걸다 (À tout prendre) | 본인 | |
1964 | 부드러운 살결 (The Soft Skin) | 주유소 직원 (목소리) | |
1970 | 야생아 (The Wild Child) | 장 이타르 박사 | |
침대와 식탁 (Bed and Board) | 신문 판매원 | 목소리, 크레딧 미등재 | |
1971 | 두 명의 영국 소녀 (Two English Girls) | 낭독자/내레이터 | |
1972 | 나 같은 멋진 아이 (Such a Gorgeous Kid Like Me) | 기자 (Un journaliste프랑스어) | |
1973 | 밤의 연출가 (Day for Night) | 페랑, 영화 감독 | |
1975 | 아델 H의 이야기 (The Story of Adèle H.) | 경찰 | 크레딧 미등재 |
1976 | 작은 변화 (Small Change) | 마르티네의 아버지 | |
1977 | 여자를 사랑한 남자 (The Man Who Loved Women) | 장례식 참석자 | |
미지와의 조우 (Close Encounters of the Third Kind) | 클로드 라콤브 | ||
1978 | 그린 룸 (The Green Room) | 쥘리앙 다베느 | 주연 |
1981 | 옆집 여자 (The Woman Next Door) | 카메오 출연 | 크레딧 미등재 |
트뤼포의 저술 목록은 다음과 같다.
- 《사십팔번의 고뇌》 (Les 400 Coups) (1960), M. Moussy 공역 (영어 번역: The 400 Blows)
- 《알프레드 히치콕에 따른 영화》 (Le Cinéma selon Alfred Hitchcock) (1967, 개정판 1983) (영어 번역: 히치콕, 히치콕/트뤼포(Helen G. Scott 공역))
- 《앙투안 두아넬의 모험》 (Les Aventures d'Antoine Doinel) (1970) (영어 번역: Adventures of Antoine Doinel; Helen G. Scott 번역)
- 《줄 앤 짐》 (Jules et Jim) (영화 각본) (1971) (영어 번역: Jules and Jim; Nicholas Fry 번역)
- 《미국 밤과 화씨 451의 일기》 (La Nuit américaine et le Journal de Fahrenheit 451) (1974)
- 《눈의 즐거움》 (Le Plaisir des yeux) (1975)
- 《용돈》 (L'Argent de poche) (1976) (영어 제목: Small Change: A Film Novel; Anselm Hollo 번역)
- 《여자를 사랑한 남자》 (L'Homme qui aimait les femmes) (1977)
- 《나의 인생 영화들》 (Les Films de ma vie) (1981) (영어 번역: The Films in My Life, Leonard Mayhew 번역)
- 《서신》 (Correspondance) (1988) (영어 번역: Correspondence, 1945–1984; Gilbert Adair 번역, 유작)
- 《프랑수아 트뤼포에 따른 영화》 (Le Cinéma selon François Truffaut) (1988), Anne Gillain 편집 (유작)
- 《벨 에포크》 (Belle époque) (1996), 장 그뤼오 공역 (유작)
2. 6. 죽음과 유산
1983년 뇌종양 진단을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프랑스 뇌이쉬르센의 미국 파리 병원에서 5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36] 사망 당시 그는 여러 편의 영화를 준비 중이었다. 몽마르트 묘지에 안장되었다.[37]많은 영화 제작자들이 트뤼포를 존경하며, 그의 작품에 대한 오마주는 ''거의 유명한'', ''얼굴'' 및 ''잠수종과 나비''와 같은 영화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해변의 카프카''에 등장한다. 영화 편집자 월터 머치는 마이클 온다트제와의 대화에서 젊은 시절 트뤼포가 자신에게 미친 영향을 언급하며, ''400번의 구타''의 마지막 장면의 정지 화면에 "전율을 느꼈다"고 말했고, 장뤼크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와 트뤼포의 ''피아니스트를 쏴라''가 그가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을 강화시켰다고 한다.[22]
트뤼포는 무신론자였지만 가톨릭 교회에 대한 존경심이 컸으며, 자신의 장례식에서 레퀴엠 미사를 요청했다.[32][33]
3. 작품 세계
프랑수아 트뤼포는 다양한 소재의 영화를 만들었다. 검은 베일을 쓴 신부 (The Bride Wore Black)(1968)는 히치콕 영화에 대한 세련된 오마주로, 잔느 모로가 출연한 잔혹한 복수극이었다. 카트린느 드뇌브와 장 폴 벨몽도가 출연한 미시시피의 인어 (Mississippi Mermaid)(1969)는 정체성이 뒤바뀌는 로맨틱 스릴러 영화였다. 두 영화 모두 코넬 울리치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16]
1966년 레이 브래드버리의 고전 공상과학 소설 『화씨 451』을 각색한 화씨 451은 트뤼포의 첫 번째 비프랑스어 영화이자 독서에 대한 그의 애정을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영국에서 촬영된 이 영화는 트뤼포의 유일한 영어 영화였는데, 영어를 거의 하지 못했던 그에게 큰 어려움을 안겨주었다. 니콜라스 로에그가 촬영 감독을 맡았으며, 트뤼포의 첫 번째 컬러 영화였다. 소규모 제작진과 저예산으로만 작업해 온 트뤼포에게 대규모 제작은 어려운 일이었고, 오스카 워너와의 갈등까지 겹쳐 촬영에 난항을 겪었다. 결국 워너는 자신의 배역에 불만을 품고 촬영장을 떠났다. 이 영화는 흥행에 실패했고, 트뤼포는 다시는 프랑스 밖에서 작업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꾸준히 컬트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16]
훔친 키스 (Stolen Kisses)(1968)는 앙투안 두아넬 시리즈의 속편으로, 앙투안의 약혼녀이자 후에 아내가 되는 크리스틴 다르봉 역에 클로드 자드(Claude Jade)가 출연했다. 트뤼포는 촬영 중 자드와 사랑에 빠져 잠시 약혼하기도 했다. 이 영화는 국제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18]
야생아 (The Wild Child)(1970)에서 트뤼포는 18세기 의사 장 마르크 가스파르 이타르 역으로 직접 출연하여, 야생아인 아베롱의 빅토르를 치료하는 과정을 연기했다.
''낮과 밤''은 영화 제작 과정에서 수반되는 개인적, 직업적 문제들을 다루면서 영화를 완성하려고 애쓰는 영화 제작진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으로, 트뤼포에게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안겨주었다.[19] 트뤼포는 영화 속 영화인 ''파멜라를 만나다''의 감독 역할을 맡았으며, ''낮과 밤''에는 그의 이전 영화의 장면들이 등장한다. 톰슨은 이 영화에 대해 "모든 영화의 기교와 그것을 일반 관객에게 명확하게 보여주는 방식에 대한 즐거움"을 보여준다고 평가했다.[6]
1975년 트뤼포는 ''아델 H의 이야기''로 명성을 얻었고, 주연 이자벨 아자니는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작은 변화''(1976)는 골든 글로브 외국어영화상 후보에 올랐다.
트뤼포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미지와의 조우''(1977)에 과학자 클로드 라콤 역으로 출연했고,[21] 헨리 제임스의 "죽은 자의 제단"을 원작으로 한 ''녹색 방''(1978)에서 주연을 맡았다.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이후 그는 두아넬 시리즈의 마지막 영화로 레오와 자드가 주연한 ''도망치는 사랑''(1979)을 제작했다.
트뤼포의 마지막 영화 중 하나인 ''마지막 지하철''(1980)은 세자르상 12개 부문에 후보로 올라 감독상을 포함한 10개 부문에서 수상했다. 그의 마지막 영화 ''비밀스럽게 너에게''(1981)는 흑백으로 촬영되어 첫 영화와 대비를 이루며, 히치콕에 대한 오마주로서 사적인 죄책감, 대중적인 결백, 살인을 조사하는 여성, 익명의 장소 등 여러 히치콕적인 주제를 다룬다.
트뤼포는 루이스 부뉴엘, 잉마르 베르이만, 로베르 브레송, 로베르토 로셀리니, 알프레드 히치콕 등에게 깊은 감탄을 표했으며, 히치콕과의 장시간 인터뷰를 바탕으로 《히치콕/트뤼포》를 집필했다.[24] 장 르누아르에 대해서는 "실수를 거의 하지 않은, 영화에서 단 한 번도 실수한 적이 없는 유일한 영화감독"이라고 칭송하며,[25] 그의 영화 《황금 마차》를 따서 자신의 제작사 이름을 "Les Films du Carrosse"라고 지었다.[4]
《카이에 뒤 시네마》 동료였던 장-뤽 고다르와 트뤼포는 초기에는 긴밀하게 협력했지만, 68년 5월 혁명 이후 작업 방식의 차이로 긴장감이 표면화되었다. 고다르는 더 정치적인, 특히 마르크스주의적인 영화를 원했지만, 트뤼포는 주로 정치적인 목적으로 영화를 만드는 것을 비판했다.[27] 1973년, 고다르는 트뤼포에게 그의 최신 영화(《낮과 밤》)를 비난하며 "거짓말쟁이"라고 칭하는 편지를 썼다.[28] 트뤼포는 이에 대해 고다르를 급진적 세련됨을 가진 위선자라고 비난하는 답장을 보냈고, 이후 둘은 다시는 서로 만나지 않았다.[29]
3. 1. 작가주의
트뤼포는 『카이예 뒤 시네마』의 평론가로 활동하며 가혹하고 용서 없는 비평으로 악명을 얻었다. 그는 "프랑스 영화의 무덤 파는 자"로 불렸으며[13] 1958년 칸 영화제에 초대받지 못한 유일한 프랑스 평론가였다. 그는 앙드레 바쟁이 영화 이론 중 가장 영향력 있는 이론 중 하나인 오토르 이론을 개발하는 것을 지지했다.[14]1954년, 트뤼포는 『카이예 뒤 시네마』에 "프랑스 영화의 특정 경향"(Une Certaine Tendance du Cinéma Français)이라는 기사를 기고하여[10] 프랑스 영화의 현황을 공격하고, 특정 각본가와 제작자들을 비난했다. 또한 장 르누아르, 로베르 브레송, 장 콕토, 자크 베커, 아벨 강스, 막스 오퓔스, 자크 타티, 로제 르낭아르 등 8명의 감독들을 언급하며 이들이 "비열한" 그리고 "그로테스크한" 등장인물과 줄거리를 고안할 능력이 없다고 비판했다. 이 기사는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트뤼포는 전국적으로 발행되는 더 널리 읽히는 문화 주간지 『아르-레트르-스펙타클르』(Arts-Lettres-Spectacles)에 기고할 제안을 받았다. 트뤼포는 다음 4년 동안 그 출판물에 500편이 넘는 영화 기사를 썼다.
트뤼포는 나중에 오토르 이론을 고안했는데, 이 이론에 따르면 감독은 자신의 작품의 "저자"이며 르누아르나 히치콕과 같은 위대한 감독들은 그들의 영화에 스며드는 독특한 스타일과 주제를 가지고 있다. 그의 이론은 당시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1960년대 미국 평론가 앤드류 사리스의 지지를 얻었다. 1966년, 트뤼포는 히치콕과의 장편 인터뷰인 『히치콕/트뤼포』를 출판했다.
3. 2. 앙투안 두아넬 연작
트뤼포는 비평과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영화 「400번의 구타」(1959)로 감독 데뷔를 했으며, 1959년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했다. 이 영화는 위험한 악동 생활, 불행한 가정 환경, 그리고 후에 소년원 생활까지 겪는 앙투안 두아넬의 이야기를 다룬다. 트뤼포는 장-피에르 레오를 두아넬 역으로 캐스팅했다. 레오와 트뤼포는 수년에 걸쳐 여러 편의 영화에서 협업했는데, 그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앙투안 두아넬 시리즈"라는 영화 시리즈로 두아넬의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간 것이다.[6]「400번의 구타」는 두아넬의 삶을 중심으로, 그가 겪는 힘든 사춘기와 불안정한 부모 관계, 고립된 청소년기 사이에서 방황하는 모습을 따라간다.[6]
《침대와 식탁》(1970)은 앙투안 두아넬 시리즈의 또 다른 영화로, 레오의 영화 속 아내인 자드가 출연했다.
3. 3. 사랑과 관계에 대한 탐구
오손 웰스의 「악의 손길」을 본 후, 트뤼포는 비평과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400번의 구타」(1959)로 감독 데뷔를 했다. 1959년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했다.[6] 이 영화는 위험한 악동 생활, 불행한 가정 환경, 그리고 후에 소년원 생활까지 겪는 앙투안 두아넬의 이야기를 따라간다. 매우 자전적인 영화로, 트뤼포와 두아넬 모두 사랑 없는 결혼 생활에서 태어난 외동아이였고, 절도와 무단결석 등의 사소한 범죄를 저질렀다.[6] 트뤼포는 장-피에르 레오를 두아넬 역으로 캐스팅했고, 레오와 트뤼포는 수년에 걸쳐 여러 편의 영화에서 협업했다. 가장 주목할 만한 협업은 "앙투안 두아넬 시리즈"라는 제목의 영화 시리즈에서 두아넬의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간 것이다.「400번의 구타」는 두아넬이 겪는 힘든 사춘기를 따라가며, 불안정한 부모 관계와 고립된 청소년기 사이에서 방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6]

트뤼포는 오스카 베르너(Oskar Werner), 앙리 세르(Henri Serre), 잔느 모로(Jeanne Moreau)가 주연한 삼각관계를 다룬 영화 《줄 앤 짐(Jules et Jim, 1962)》을 감독했다. 톰슨(Thomson)은 "《줄 앤 짐》에서 트뤼포는 소설가 앙리-피에르 로셰(Henri-Pierre Roché)와 가장 성공적인 협업을 이루었는데, 그는 《두 명의 영국 여성》(Les Deux Anglaises)의 저자이며 트뤼포가 좋아하는 상황, 즉 세 사람이 모두 서로 사랑하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를 꺼리는 열정적인 삼각 관계에 갇히는 상황을 다루었습니다."라고 썼다.[6]
《훔친 키스 (Stolen Kisses)》(1968)는 앙투안 두아넬 시리즈의 속편으로, 앙투안의 약혼녀이자 후에 아내가 되는 크리스틴 다르봉 역에 클로드 자드(Claude Jade)가 출연했다. 촬영 중 트뤼포는 자드와 사랑에 빠져 잠시 약혼하기도 했다.[18]
《침대와 식탁》(1970)은 또 다른 앙투안 두아넬 영화로, 레오의 영화 속 아내인 자드가 출연했다.
《두 명의 영국 소녀》(1971)는 프루스트와 브론테 자매에 관한 이야기로,[6] "줄 엣 짐"의 러브스토리에 대한 여성적인 반영이다. '줄 엣 짐'을 쓴 로셰(Roché)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두 자매와 동시에 사랑에 빠진 한 남자와 수년에 걸친 그들의 연애를 다룬다.
3. 4. 영화에 대한 애정
오손 웰스의 「악의 손길」을 엑스포 58에서 본 후, 트뤼포는 비평과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400번의 구타」(1959)로 감독 데뷔를 했다. 그는 1959년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했다.[6] 이 영화는 프랑스 누벨바그 운동의 시작을 알렸으며, 장뤽 고다르, 클로드 샤브롤, 자크 리베트와 같은 감독들이 이 운동을 이끌었다. 누벨바그는 전통적인 영화 구조에 대한 자의식적인 거부를 다루었는데, 이는 트뤼포가 수년 동안 써 온 주제였다.트뤼포는 장 르누아르에 대해 "저는 르누아르가 실수를 거의 하지 않은, 영화에서 단 한 번도 실수한 적이 없는 유일한 영화감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가 실수하지 않은 이유는 항상 단순함에 기반한 해결책, 인간적인 해결책을 찾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결코 가식적인 적이 없는 영화감독입니다."라고 말했다.[25] 트뤼포는 르누아르의 《황금 마차》를 따서 자신의 제작사 이름을 "Les Films du Carrosse"라고 지었다.[4]
트뤼포는 루이스 부뉴엘, 잉마르 베르이만, 로베르 브레송, 로베르토 로셀리니, 알프레드 히치콕 등의 영화감독들에게 깊은 감탄을 표했다. 그는 히치콕과의 장시간 인터뷰를 바탕으로 히치콕에 관한 책인 《히치콕/트뤼포》를 집필했다.[24] 장 르누아르가 미국에서 좌절에 빠져 있다는 소식을 듣고 여러 차례 미국을 방문하여 그를 격려했으며, 르누아르가 죽을 때까지 부자와 같은 관계를 유지했다. 또한, 자신의 분신과 같은 역할을 계속했던 장피에르 레오에게도 아들과 같은 대우를 했다고 한다.
1980년 2월, 『녹색의 방』 홍보 캠페인으로 일본을 방문했을 때, 일본 영화 저널리스트가 당시 명화극장에서 상영 중이던 후카사쿠 긴지 감독의 『仁義의 무덤』을 추천하여 트뤼포에게 보여주었다.[52] 그러나 트뤼포는 상영 10분 만에 극장을 나갔고,[52] "왜 그랬느냐?"라는 질문에 "매우 피곤했고, 폭력적인 장면이 많아서 견딜 수 없었다. 폭력적인 영화보다 에로틱한 영화가 훨씬 좋다"라고 말했다.[52] "지금까지 본 영화 중에서 좋아하는 영화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는 "오손 웰스 감독의 『시민 케인』, 그리고 페데리코 페리니 감독의 『카사노바』가 좋다. 다른 것도 많아서 다 말할 수 없다. 그 영화들에 대해서는 여러 책에 써두었으니 읽어달라"라고 대답했다.[52]
3. 5. 누벨바그 스타일
프랑수아 트뤼포는 오토르 이론을 통해 감독을 영화의 "저자"로 보았으며, 르누아르나 히치콕과 같은 위대한 감독들은 독특한 스타일과 주제를 영화에 담아낸다고 주장했다. 그의 이론은 당시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1960년대 미국 평론가 앤드류 사리스의 지지를 받았다.[14] 1966년, 트뤼포는 히치콕과의 장편 인터뷰를 담은 책인 『히치콕/트뤼포』를 출판했다.트뤼포는 프랑스 누벨바그 운동의 선구자 중 한 명으로, 그의 데뷔작 《400번의 구타》(1959)는 이 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20] 이 영화는 전통적인 영화 구조를 거부하고, 현장 촬영, 유동적인 카메라, 즉흥적인 서정성과 같은 새로운 영화 기법들을 선보였다.[6]
《400번의 구타》의 성공 이후, 트뤼포는 《피아니스트를 쏴라》(1960)에서 불연속적인 편집과 무작위적인 내레이션 등 더욱 과감한 실험을 시도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비평가들의 호평에도 불구하고 흥행에는 실패했고, 트뤼포는 이후 이와 같은 실험적인 스타일을 다시 시도하지 않았다.[6]
4. 작품 목록
프랑수아 트뤼포는 영화감독, 각본가, 제작자로 활동하며 다양한 장편 영화와 단편 영화를 남겼다. 주요 작품으로는 다음과 같다.
연도 | 작품명 (원제) | 출연 배우 |
---|---|---|
1959년 | 400번의 구타(Les quatre cents coups) | 장피에르 레오 |
1960년 | 피아니스트를 쏴라(Tirez sur le pianiste) | 샤를 아즈나부르, 마리 뒤부아 |
1962년 | 쥴 앤 짐(Jules et Jim) | 잔 모로, 오스카 베르너 |
1973년 | 아메리카의 밤(La nuit américaine) | 재클린 비셋, 장피에르 레오 |
1980년 | 마지막 지하철(Le dernier Métro) | 카트린 드뇌브, 제라르 드파르디외 |
1983년 | 신나는 일요일(Vivement dimanche!) | 파니 아르당, 장 루이 트랭티낭 |
4. 1. 장편 영화
연도 | 제목 | 감독 | 각본 | 제작 | 비고 |
---|---|---|---|---|---|
1959 | 400번의 구타 | ||||
1960 | 쉬어탄츠 | ||||
피아니스트를 쏴라 | |||||
아미 게임 | 끌로드 드 지브레와 공동 감독 | ||||
1962 | 줄 앤 짐 | ||||
1964 | 부드러운 피부 | ||||
1966 | 화씨 451 | 영어 데뷔작 | |||
1968 | 검은색 드레스를 입은 신부 | ||||
훔친 키스 | |||||
1969 | 미시시피 인어 | ||||
1970 | 야생아 | ||||
침대와 식탁 | |||||
1971 | 두 명의 영국 소녀 | ||||
1972 | 나처럼 멋진 아이 | ||||
1973 | 밤의 낮 | ||||
1975 | 아델 H의 이야기 | ||||
1976 | 작은 변화 | ||||
1977 | 여자를 사랑한 남자 | ||||
1978 | 녹색 방 | ||||
1979 | 도망치는 사랑 | ||||
1980 | 마지막 지하철 | ||||
1981 | 옆집 여자 | ||||
1983 | 비밀스럽게 당신의 것 | ||||
1988 | 작은 도둑 | 사후 공개 | |||
4. 2. 단편 영화
비평가였던 트뤼포는 영화 제작을 결심했다. 그는 단편 영화 ''일종의 방문(Une Visite)''(1955)으로 시작하여 ''미스통(Les Mistons)''(1957)을 이어 만들었다.연도 | 제목 | 감독 | 각본 | 비고 |
---|---|---|---|---|
1955 | 방문 | |||
1957 | 미스통 | |||
1961 | 물 이야기 | 장-뤽 고다르와 공동 감독 | ||
1962 | 앙투안과 콜레트 | 스무 살의 사랑 중 한 편 |
5. 수상 내역
상 | 년도 | 부문 | 작품 | 결과 | 참고자료 |
---|---|---|---|---|---|
아카데미상 | 1959 | 각본상 | 400번의 일격 | [38] | |
1968 | 외국어영화상 | 도둑맞은 키스 | [39] | ||
1973 | 외국어영화상 | 밤의 연인 | [19] | ||
감독상 | |||||
각본상 | |||||
1980 | 외국어영화상 | 마지막 지하철 | [40] | ||
영국 아카데미 영화상(BAFTA) | 1973 | 최우수 작품상 | 밤의 연인 | ||
감독상 | |||||
1977 | 남우조연상 | 미지와의 조우 | |||
1983 | 외국어 영화상 | 일요일이 기다려진다! | |||
베를린 국제영화제 | 1976 | 황금곰상 | 작은 변화 | [41] | |
1977 | 황금곰상 | 여자를 사랑한 남자 | [42] | ||
1979 | 황금곰상 | 도망치는 사랑 | [43] | ||
칸 영화제 | 1959 | 황금종려상 | 400번의 일격 | ||
감독상 | |||||
1964 | 황금종려상 | 부드러운 피부 | |||
세자르상 | 1975 | 감독상 | 아델 H의 이야기 | ||
1980 | 최우수 작품상 | 마지막 지하철 | |||
감독상 | |||||
각본상 | |||||
1983 | 감독상 | 은밀하게 당신에게 | |||
마르 델 플라타 국제영화제 | 1962 | 최우수 작품상 | 줄 앤 짐 | ||
감독상 | |||||
베니스 국제영화제 | 1966 | 황금사자상 | 화씨 451 | ||
뉴욕 영화 비평가 협회상 | 1959년 | 외국어 영화상 | 『네 살짜리 어른』 | ||
1969년 | 각본상 | 『밤안개 속의 연인들』 | |||
1973년 | 작품상 | 『미국의 밤』 | |||
감독상 | |||||
1975년 | 각본상 | 『아델의 이야기』 | |||
1981년 | 외국어 영화상 | 『종착역』 | |||
프랑스 영화 비평가 협회상 | 1959년 | 작품상 | 『네 살짜리 어른』 | ||
1968년 | 작품상 | 『밤안개 속의 연인들』 | |||
1970년 | 작품상 | 『야생 소년』 | |||
1973년 | 작품상 | 『미국의 밤』 | |||
1976년 | 작품상 | 『아델의 이야기』 | |||
보딜상 | 1960년 | 비미국 영화상 | 『네 살짜리 어른』 | ||
1963년 | 비미국 영화상 | 『갑자기 불꽃처럼』 | |||
1965년 | 비미국 영화상 | 『부드러운 살결』 | |||
루이 델뤼크상 | 1968년 | 『밤안개 속의 연인들』 | |||
골든 글로브상 | 1968년 | 외국어 영화상 | 『검은 드레스의 신부』 | ||
외국어 영화상 | 『밤안개 속의 연인들』 | ||||
1973년 | 외국어 영화상 | 『미국의 밤』 | |||
1976년 | 외국어 영화상 | 『트뤼포의 사춘기』 | |||
1980년 | 외국어 영화상 | 『종착역』 | |||
전미 영화 비평가 협회상 | 1969년 | 작품상 | 『밤안개 속의 연인들』 | ||
감독상 | |||||
1970년 | 작품상 | 『야생 소년』 | |||
감독상 | |||||
각본상 | |||||
1973년 | 작품상 | 『미국의 밤』 | |||
감독상 | |||||
내셔널 보드 오브 리뷰상 | 1970년 | 감독상 | 『야생 소년』 | ||
외국어 영화상 | |||||
1975년 | 외국어 영화상 | 『아델의 이야기』 | |||
나스트로 다르젠토상 | 1963년 | 외국 감독상 | 『갑자기 불꽃처럼』 | ||
1974년 | 외국 감독상 | 『미국의 밤』 | |||
1981년 | 외국 감독상 | 『종착역』 | |||
캔자스시티 영화 비평가 협회상 | 1976년 | 외국어 영화상 | 『트뤼포의 사춘기』 | ||
보스턴 영화 비평가 협회상 | 1980년 | 외국어 영화상 | 『종착역』 | ||
다비드 디 도나텔로상 | 1981년 | 루키노 비스콘티상 | |||
로스앤젤레스 영화 비평가 협회상 | 1984년 | 특별상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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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건 타임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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